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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그린북>이 소개하는 부끄러운 역사책

멋지오 2024. 7. 27.

영화-그린북-포스터

 

두 남자의 세계에 서서히 스며들다

이 영화에서는 극명히 대비되는 성격의 두 남자가 중심인물입니다.

살아온 환경과 현재의 환경 자체가 극과 극으로 다른 두 남자 돈 셜리와 토니입니다.

클래식 음악 교육을 받은 품위 넘치는 피아니스트 돈 셜리는 흑인입니다.

토니는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세상 화끈한 성격의 다혈질로 돈셜리의 백인 운전기사입니다.

제가 인물소개를 이렇게 흑인이니 백인이니 구분하듯 언급하는 게 참 불편합니다만 영화의 배경이 60년대 미국 인종차별이 존재하던 시기였고 영화 내내 부당한 차별을 당하는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잠 까만 봐도 두 사람의 세계는 금방 파악이 됩니다.

도저히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두 세계였지만 8주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팔이 안으로 굽는 것처럼 서로의 편이 되어갑니다. 

서로 맞지 않는 가치관 때문에 싸우기도 했지만 서로를 의지해야 하는 상황에 두 개의 세계는 서로에게 스며들어 갑니다.

그걸 지켜보는 저도 이 두 남자에게 점차 스며들어 갔습니다.

 

인종을 차별하다니 부끄러운 줄 아시오

돈 셜리는 뉴욕 카네기홀에 살면서 클래식 피아니스트로 명성이 자자한 예술가입니다.

그 당시 흑인으로써는 보기 드문 클래식 음악을 하는 성공한 피아니스트였습니다.

그런 그가 굳이 인종차별이 더욱 심한 남부지역의 공연을 해야 할 의무는 없었지만 스스로 자청해 투어를 나섭니다.

흑인인 자신에게 위험한 상황이 닥칠 것을 예감해 거친 곳에서 해결사로 유명한 토니를 운전기사로 고용하게 됩니다.

 

인종이 다를 순 있지만 그걸 이유로 차별을 하다니 말이 되는 논리인가요?

도대체 누가 누굴 차별할 권리가 있다는 건가요?

흑인에게만 적용되는 통금 시간이 있는가 하면 흑인이라서 못 들어가는 식당이 있습니다.

화장실도 백인과 같이 못쓰고 흑인이라는 이유로 조롱하고 때립니다. 

숙박도 흑인전용 시설에서만 가능합니다. 

이게 뭔 부끄러운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전통이니 규칙이니 운운하면서 자신들이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부당함을 넘어선 비상식적인 상황이 반복되자 인종차별 주의자였던 토니마저도 이건 옳지 않다고 판단해 욱함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날리게 됩니다. 

하지만 돈 셜리는 그 어느 상황에서도 교양을 잃지 않고  말합니다.

폭력으로는 못 이겨요. 품위를 유지할 때만 이기지. 품위가 늘 승리하는 거요

 

인종차별 주의적 상황에 똑같이 반응했다가는 자신도 똑같은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반응하지 말고 대응하며 품위와 교양을 유지할 때에 자신들이 얼마나 원시적이고 미개했는지를 깨닫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인간대 인간으로서 친구가 되다

이 영화의 제목인 그린북은 1930년대에 출판된 책으로 흑인운전자들을 위한 가이드북입니다. 흑인전용의 업소가 따로 있었기 때문에 먼 거리 이동하는 흑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업소들만 따로 모아놓은 책입니다. 화장실조차도 백인들과 함께 못썼으니 미리 알아놓고 그곳으로 가라는 거죠.

부끄러운 역사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그에 못지않은 부끄러운 역사가 있죠.

 

돈 셜리와 토니는 8주간의 우여곡절 끝에 눈보라 치는 날 겨우겨우 집으로 돌아옵니다. 

크리스마스까지는 집에 도착해야 하는 토니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폭설을 뚫고 겨우 도착하죠.

가족과 자녀가 기다리는 토니와는 반대로 돈 셜리는 화려하지만 텅 빈 집으로 들어섭니다.

성처럼 화려한 자택에 홀로 앉아 있는 돈셜리에게 찐한 외로움이 느껴집니다.

무대 위에서는 박수를 받지만 무대아래에서는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는 외로운 피아니스트입니다. 

 

토니도 마음한구석이 허전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있지만 8주간 동거동락하던 돈셜리는 혼자 외로울걸 아니까 신경이 쓰입니다. 

그때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용기를 내어 토니의 집을 방문한 돈셜리와 그를 뜨겁게 맞아주는 토니는 고용주와 고용인을 뛰어넘어 인간대 인간으로서 친구가 됩니다.

저도 영화가 주는 메시지에 내내 묵직한 마음이었다가 마지막 둘의 포옹장면에서 찐 웃음이 지어졌습니다. 

물과 기름처럼 전혀 섞일 것 같지 않던 두 사람이 서로 편견을 허물고 용기를 내어 다가가 비로소 친구가 될 때 그 어느 사랑영화 못지않은 흐뭇함을 자아냈습니다.

예술가로서 천재성은 갖추고 있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용기가 필요했기에 위험할 수 있는 남부공연을 선택한 거처럼 토니의 집 앞으로 스스로 찾아가는 용기를 내어준 돈셜리 박사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영화적 기교 없이 비교적 담담하게 영화를 풀어나가고 억지 감동이 아닌 찐 감동과 찐 웃음으로 행복함을 느끼고 싶은 분들에게 영화 그린북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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